니시코리 게이(25)의 US오픈 준우승으로 일본 테니스가 활기를 띠고 있다. 11년 전 모리타 마사아키 일본테니스협회장은 14세 소년 니시코리를 미국으로 유학보냈다. 일본의 대기업 소니를 세운 모리타 아키오의 동생인 그는 일본 테니스의 희망을 키우기 위해 사재를 털어 테니스 펀드를 만들었고 유망주들을 지원했다. 모리타가 뿌린 씨앗 가운데 가운데 하나가 무럭무럭 자라 아시아 남자선수 최초의 그랜드슬램대회 결승 진출이라는 화려한 꽃으로 활짝 피었다.
니시코리가 역사적인 경기를 치른 지난 9일(한국시간) 발표된 남자프로테니스(ATP) 랭킹에서 한국 테니스의 희망 정현(18·삼일공고)은 180위로 뛰어올랐다. 지난달 방콕오픈 챌린저에서 우승한데 따른 랭킹 상승이다. 국내 남자선수가 세계 200위 안에 든 것은 은퇴한 임규태가 2010년 2월 197위에 오른 것이 마지막이었다. 남자프로테니스에는 가장 권위가 있는 4개의 그랜드슬램대회가 있고, ATP가 주관하는 투어대회와 챌린저대회가 있다. 그 아래가 퓨처스대회다. 아직 본격적으로 프로로 전향하지 않은 주니어 선수가 퓨처스 단계를 가볍게 통과해 챌린저급 선수로 자리잡으면서 이형택에 이은 투어급 선수의 등장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지금의 니시코리와 같은 나이가 되는 7년 뒤 정현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주니어 시절의 니시코리는 성적 면에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오렌지볼 14세부에서 준우승했고 17세 때 호주오픈과 프랑스오픈 주니어부에서 8강까지 올랐다. 오렌지볼 16세부 우승, 윔블던 주니어 결승 진출을 이룬 정현이 뒤질 게 없다. 그러나 이후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다. IMG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으며 현재의 공격적인 포핸드를 만들어갔고, 강한 상대들과 싸우며 상황을 읽고 전략적으로 플레이하는 힘을 키워갔다. 17세 때부터 주니어대회와 병행해 성인 대회에 본격적으로 출전했다. 그 결과 7년 전인 2007년 투어대회 8강 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1년 뒤 10대의 나이에 투어대회 정상에 섰다. IMG 아카데미가 있는 플로리다를 근거로 삼은 까닭에 처음부터 미국 각지의 서키트, 챌린저가 활동무대였다.
그랜드슬램대회와 투어대회 예선에 뛸 수 있는 랭킹을 확보한 정현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프로선수로 나선다. 내년 호주오픈은 물론 그에 앞서 열리는 웜업 대회들에도 출전한다. 그랜드슬램대회에 따라 이어지는 하드코트-클레이코트-잔디코트-하드코트 시즌에 맞춰 투어대회 예선이나 챌린저대회에 나서 경험을 쌓고 투어대회 본선에 바로 나갈 수 있도록 랭킹을 끌어올릴 계획이다. 세계 100위 안팎까지 랭킹을 올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제까지는 랭킹포인트를 따기 위해 주로 아시아 지역의 퓨처스와 챌린저에 출전했지만 앞으로는 참가하는 대회와 상대하는 선수들의 수준이 다르다. 니시코리가 세계 200위 이내로 진입한 것은 2008년 2월. 정현과 비슷하다. 그러나 투어대회에서 우승하면서 2개월 만에 다시 100위의 벽을 무너뜨렸고 7개월 뒤에는 완전히 100위 이내의 투어 선수로 자리잡았다. 정현은 프로 전향 이전의 활동 무대가 니시코리와 다른 까닭에 좀 더 적응과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면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과정은 곧 기회이기도 하다. 랭킹포인트를 따는 것도, 지키는 것도 이전보다 훨씬 힘들지만 강한 상대와의 잦은 경기 경험을 통해 기량도 빨리 향상되기 때문이다. 방콕오픈 준결승에서 세계 106위인 일본의 소에다 고를 이겼을 만큼 강한 상대와의 대결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자세를 갖고 있다. 정현을 지도하고 있는 윤용일 삼성증권 코치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랭킹이 올랐지만 기량도 두드러지게 향상되고 있다. 문제로 지적돼온 서브도 최근에는 시속 190㎞까지 나오고 있다. 올겨울 부족한 점들을 좀 더 보완할 예정”이라며 투어선수로의 성장에 자신감을 보였다. 윤 코치는 “투어 선수는 경기 뿐 아니라 생활 자체가 버텨내기 힘든 강행군이다. 정현은 강한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니시코리는 소니와 IMG의 지원으로 어릴 때부터 세계적인 선수들과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급성장할 수 있었다. 정현을 후원하고 있는 삼성증권의 김일순 감독은 “스타 부재로 힘들었던 한국 테니스가 이형택 이후 다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영어 교육, 정현만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 등 ‘톱 100’의 투어급 선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니시코리가 전담팀을 가질 정도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가능성을 확실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정현에게도 그런 것이 필요하다.
